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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 7. 7. 01:58

펌글
http://kr.blog.yahoo.com/psy_jjanga/268267.html?p=2&pm=l&tc=30&tt=1246602417




이 글의 주제는 침묵이다. 결국 한동안 침묵에 대해 수다를 떨게 생겼다. 침묵이여, 양해를 구한다.
그리고 독자들에게도 양해를 구한다.

많은 이들이 이 글을 통해 침묵으로 자신을 답답하게 하는 누군가의 마음을 알 수 있으리라 기대할 것 같은데, 미안하지만 이 글에서 나는 침묵하는 자의 마음에 대해서는 다루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침묵이란 무엇인가?

침묵의 심리학을 논하기 전에 먼저 침묵이 무엇인지부터 확인해보자.
당신이 생각하는 침묵이란 무엇인가? 단순히 말(필화나 수화를 포함해서)을 하지 않는 것인가?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말은 많지 않은데 이것저것 일을 벌리면서 시끄러운 사람도 있다. 말은 우리가 다른 이들에게 자신의 뜻(혹은 메시지)을 전달하는 여러 가지 방법 중의 하나일 뿐이다.

침묵을 그림으로 표현하자면 아마 이 글의 앞머리에 있는 그림 처럼 되지 않을까 싶다.
이 그림은 심리검사 중의 하나인 로샤 검사(Rorschach Test)에 사용하는 그림을 조금 변형한 것이다.(진짜 로샤 그림과는 좀 다르다)

이런 그림으로 무슨 검사를 하는지는 나중에 설명하기로 하고, 우선 왜 이 그림이 침묵을 뜻한다고 내세웠는지 설명해보자.

이 그림은 아무것도 적극적으로 말하지 않는다.
아래와 같은 그림과 위의 그림을 비교해 보면 적극적으로 말한다는 게 뭔지 좀더 실감할 수 있다, 아래 그림을 보라, 그 자체가 “불조심을 하자!” 고 온몸을 다해 외치고 있지 않은가.



이렇게 뜻이 명확한 포스터를 보다가 처음 그림을 보면 갑자기 답답해진다. 도대체 뭘 그린 것인지, 왜 그린 것인지 그림이 직접 말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런 그림은 의도적으로 그려졌다기보다는 우연히 만들어진 것에 가깝다.) 즉, 이 그림은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 졌지만, 우리에게 정확히 무슨 이유로 만들어졌는지, 즉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그려진 것인지를 명확히 드러내지 않는다. 침묵도 마찬가지다. 침묵은 단순히 말을 하지 않는 상태가 아니라 어떤 방법으로도 자기의 뜻을 적극적으로 표현하지 않는 상태이다.

그럼 이제부터 우리가 이 그림들을 보면서 경험하는 현상을 통해 침묵의 심리학을 설명해보자.


침묵도 메시지다.

여러분은 위의 그림을 보면서 어떤 생각을 했는가? 그저 ‘괴상한 그림’이라고만 생각했는가? 당신이 머리가 완전히 굳어진 사람만 아니라면, 그렇게 되지는 않을 것이다. 비록 이 그림이 우리에게 뭔가를 적극적으로 전달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이 그림에서 무엇인가를 보고 해석한다.

실제로 모든 존재는 그것이 존재하는 한 메시지를 전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존재하는 것 자체로 어떤 의미를 전달한다. 당신이 짝사랑에 빠져본 경험이 있다면 이게 무슨 소린지 알 것이다. 당신이 몰래 사모하는 사람이 당신 곁을 스쳐 지나가는 것만으로도, 당신의 마음속에는 만개의 파도가 몰아친다. 물론 존재하면서도 아무런 의미가 없는 사람도 있다. 이런 자에게 우리는 ‘그는 존재감이 없다’ 라고 말한다. 당신이 누군가에 대해서 이렇게 말할 때 당신은 이미 ‘존재=메시지’ 임을 받아들인 것이다.

위의 그림이 적극적으로 말하는 것은 없지만 우리는 거기서 다양한 메시지를 본다. 마찬가지로 당신의 상대방이 침묵을 지키고 있더라도, 당신은 그의 침묵으로부터 다양한 메시지를 읽을 수 있다. 이것이 침묵의 그림을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침묵의 첫 번째 특징이다.


침묵의 메시지는 전적으로 맥락에 의해 결정된다.

이제 첫 번째 그림을 당신 친구에게 보여주고 이게 무슨 그림인지 물어 보라. 그의 대답은 당신의 생각과 같은가?

두 번째 그림이라면 답은 ‘그렇다’ 가 될 것이다. 포스터가 좀 조잡하다든지 하는 평을 덧붙일 수는 있겠지만, 누구든지 그게 불조심 포스터라는 데에는 동의할 것이다. 그러나 첫 번째 그림에 대해서라면 답은 ‘아니다’ 일거다. 당신이 그 그림 속에서 나비를 보았다면, 당신의 친구는 배트맨이나 쌍둥이 난쟁이, 혹은 주황색 눈의 악마를 보았을 것이다. 즉, 이 그림에 대한 해석은 그야말로 각양각색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그렇게 다양한 해석이 나올 수 있었을까?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이 그림의 용도와도 관련되어 있다.

실제로 위의 그림들은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그림을 보는 사람의 마음을 해석하기 위해 사용된다. 당신이 이 그림으로부터 어떤 메시지를 전달받았든, 그것은 그 그림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다. 그 메시지는 바로 당신의 마음과 당신이 그 그림을 보던 상황에서 온 것이다. 이것을 심리학 용어로 '투사(projection)'라고 한다. 이 그림들은 그 자체가 텅 비어 있기 때문에 결국에는 마치 영화관의 스크린처럼 보는 사람의 마음속에 담긴 필름이 투영되어 나타나는 것이다. 이는 침묵을 통해 당신이 읽은 메시지가 더 강렬하게 남을 수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실제로 그 메시지를 만든 것은 당신이기 때문이다.

광고업계의 전설이라 할 수 있는 [TTL] 광고를 보자. 나는 그 브랜드의 런칭 광고를 보았을 때의 생경함을 아직도 기억한다. 광고하려는 물건도 보이지 않고, 아무런 대사도 없고, 심지어 색깔 조차도 조용한 흑백이었던 그 광고는 무슨 뜻인지 알 수 없는 TTL이란 암호만 남기고 사라졌다. 그 광고는 아무런 메시지를 담지 않은, 침묵하는 광고의 전형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로샤검사 그림처럼 보는 이들의 마음이 투사되면서 그 브랜드를 마치 자기의 것처럼 느낄 수 있었던 셈이다. 그러기에 옛 현자가 말하지 않던가, 달변이 은이라면, 침묵은 금이다. 왜냐하면 침묵은 오히려 더 많은 메시지를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위와 같은 경우, 침묵의 메시지를 해석하는 당신의 마음상태와 주변 상황을 학자들은 맥락(context)이라고 부른다. 즉, 침묵하는 그림의 뜻은 그 그림을 경험하는 맥락에 의해 전적으로 결정된다고 설명할 수 있다. 물론 맥락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메시지는 없다. 그러나 침묵의 메시지는 전적으로 맥락에 의존하여 구성된다.

우리의 침묵도 마찬가지다. 누군가 당신 앞에서 침묵한다고 치자. 당신은 그의 침묵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그것은 전적으로 당신의 마음상태와 그와 당신이 처한 상황이라는 맥락에 달려있다. 어떤 상황에서는 당신 연인의 침묵이 “당신을 사랑한다” 는 뜻인 반면, 다른 상황에서는 “이제 우리 그만 만나자” 일수도 있다. 마찬가지로 당신이 속상하고 신경질 날 때 당신 연인의 침묵은 “나도 짜증스러워”로 해석될 수 있는 반면, 당신이 평온하고 즐거울 때는 같은 침묵이 “당신과 함께 있어 행복해"로 해석될 것이다.


맥락을 조정하고 배치하는 자의 힘있는 침묵

위에서 나는 침묵이란 주변의 맥락에 의해 흑도 백도 될 수 있는 존재라고 말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침묵에 대한 우리의 경험을 전부 설명하지는 못한다. 당신은 침묵 앞에서 압도되어본 적이 없는가? 실제로 그런 경험은 존재한다. 그렇다면 어째서 침묵이 수백 마디의 말보다 더 강한 힘을 갖는 경우가 생기는 걸까?

어떤 대학 학생들이 자기 사학재단의 비리와 전횡에 대해 수년간 항의하고 고발해 왔지만, 문제의 재단은 묵묵부답으로 일관해온 경우를 알고 있다. 이때 그 재단이사장이 양심에 가책을 느껴서 말을 하지 못한다고 생각한다면 큰 착각이다. 그는 말을 할 필요가 없다. 어차피 그 판을 짜고 주도권을 잡은 것은 자신이기 때문이다.

박정희 기념관건립을 추진하는 홈페이지가 개설되었다고 치자, 그 홈페이지의 게시판에는 기념관건립을 찬성하는 글이 많이 올라갈까, 반대하는 글이 더 많을까? 한 연구에서 실제로 조사한 바에 의하면 반대하는 글이 더 많았다고 한다. 그렇다면 대부분의 한국인이 기념관 건립을 반대하는 것일까? (그랬으면 얼마나 좋겠느냐마는...) 그렇지 않다. 실제로 기념관 건립에 찬성하는 사람들은 침묵을 지키고 있다. 왜냐하면 굳이 자신의 찬성을 표현하지 않아도 기념관은 건립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만약 그들이 격렬한 찬성의 글을 내놓는 때가 온다면, 그것은 그들이 쌓은 맥락의 힘이 함락될 위기에 처했음을 의미한다. 그런 의미에서 최근 조선일보의 발작증세나 이문열의 잇따른 망언과 뒷수습은 한편으론 보기에 즐겁다. 잘나가던 시기의 조선일보는 침묵할 여유가 있었으나 이제는 적어도 그렇지 않음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침묵의 힘이 늘 이렇게 짜증스럽기만 한 것은 아니다.

생각해 보라, 누군가에게 말로 사랑을 표현하는 것도 좋지만, 상대방의 마음을 헤아려주고 상대방이 필요로 하는 것을 말없이 찾아주는 조용한 행동이 더욱 효과적이지 않던가. 그런 행동이 더 상대방을 감동시킬 수 있는 것은 말하는 것 보다 그런 배려가 더 많은 노력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결국 힘있는 침묵이란 침묵 그 자체에서가 아니라, 침묵의 주변 맥락에 대한 통제력 혹은 노력에서 나온다. 당신이 아무것도 하지 않고 단순히 침묵하기만 한다고 상대방이 당신의 뜻을 알아줄 리는 없는 것이다.


당신은 침묵하기 전에 맥락을 구성하기 위해 노력했는가?

교사라는 내 직업이 말을 많이 할 수밖에 없는 것이긴 하지만, 나는 사실 오랫동안 자기 말을 하는 사람을 버거워한다. 그래서 특별한 일 없이 만나는 술자리는 보통 1시간을 넘기면 점점 감당하기 힘들어진다. 그때부터는 이미 했던 이야기가 다시 돌기 시작하니까...

생각해 보면 살아가면서 나 혼자 5분 이상을 말해할 만큼 대단한 메시지를 전해야 했던 경우는 거의 없었던 것 같다. 물론 말하는데 5분을 넘긴 일은 많았겠지만, 그것은 내 말주변이 부족하여 제대로 정리를 못했거나 같은 말을 반복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만약 1시간 이상 중복되지 않는 내용으로 자기 말을 채울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소설가가 아니면 사기꾼이라고 믿는 사람이다. 어찌되었건, 나도 침묵을 좋아하는 인간이므로 침묵하는 자에게 무슨 충고를 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그러나 이것만은 확실하다.

당신이 맥락을 조정하는 힘을 가지고 있거나, 맥락을 구성하고 배치하기 위해서 이미 엄청난 노력을 쏟아 부은 다음이라면, 당신은 침묵해도 된다. 그런 상황에서 당신의 침묵은 당신의 힘과 노력을 그 어떤 방법보다도 강력하고 압도적으로 드러내줄 것이다. 그러나 당신이 아무것도 하지 않았고, 아무런 힘도 없다면, 당신의 침묵은 그저 무책임한 자기방기일 뿐이다. “님들 뜻대로 해석해주세요” 라고 말하는 것과 같은....

침묵도 아무나 하는게 아니다.